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토니 포트 와인을 곁들이다
– 본 글에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온 세상이 반짝이는 연말 축제 시즌이 지나고 추위가 익숙해질 즈음 꼭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이터널 선샤인’, 제목만 보면 끝없는 햇살이 비추는 멜로나 로맨스 영화가 연상되지만 영어 원제목은 상당히 철학적이다. ‘이터널 선샤인 오브 더 스팟리스 마인드(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정도로 직역되는 이 영화는 ‘사랑했던 기억을 지움으로써 그 감정도 지우기로 선택’한 남녀가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먼저 기억을 삭제해버린 여자와 그걸 알고 홧김에 덩달아 삭제하기로 결심한 남자, 그 과정에서 깨닫는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 과연 이들은 티끌 하나 없는 마음에서 영원한 햇살을 만날 수 있었을까.

밸런타인데이 아침, 이유없이 불쾌한 기분 속에 충동적으로 몬탁으로 떠난 조엘은 혼자 해변을 걷는 파란 머리의 클레멘타인을 보게 된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눈이 마주친 둘은 클레멘타인의 적극적인 리드로 대화를 나눈다. 그 시작부터 끝까지 막무가내로 들이대면서도 변덕스러운 클레멘타인과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조엘. 한마디로 대책 없이 안 어울리는 둘은 그러나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다. 첫 만남이 아니라 기억을 지운 후의 재회라는 사실,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음에도 갖게 되는 호감은 ‘기억의 중심에 감정이 있는데 기억을 지움으로써 감정도 지운다’는 영화적 설정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밸런타인 데이 전날 밤, 기억을 삭제하는 과정에 있는 조엘의 머릿속에서 전개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행복했던 기억마저 하나씩 지워지는 과정을 보며, 조엘의 무의식은 ‘사실은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 속에서 만난 클레멘타인의 손을 잡고 그녀가 삭제당하지 않을 곳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조엘. 감추고 싶었던 어릴 적 치욕의 현장까지 도망쳐 봤지만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둘은 처음 만났던 몬탁으로 향한다. 곧 기억이 모두 사라질 것을 예감하며 “이제 어떻게 하지?”라 묻는 기억 속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오히려 담담하게 웃는다. “그냥 즐기자(Enjoy it)”라며.
이들의 기억을 지워준 ‘라쿠나’사의 박사와 직원 메리의 이야기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이야기와 평행을 이룬다. 아버지뻘 박사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넘어 사랑하는 감정을 가져버린 메리와 거부하지 못하는 박사. 순간의 충동으로 박사와 키스를 해버린 그날 밤, 메리는 과거에도 박사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 힘들어하다 기억을 지운 게 현재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지식을 뽐내듯 읊은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이 독이 되어 돌아온 것. 망각은 복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을 지워도 감정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메리는 ‘라쿠나’사에서 기억을 지운 고객들에게 각자의 기억이 담긴 기록물을 돌려줌으로써 과거를 반성한다.
다시 현실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서사로 돌아와서, 밸런타인데이에 몬탁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가까워지던 둘은 메리가 보낸 과거 기억이 담긴 기록물을 받아 들고는 혼란에 빠진다. 서로를 힘들어했던 과거를 알고 뒤돌아서는 클레멘타인. 늘 조심스럽고 소극적이었던 조엘이지만 이번엔 떠나는 클레멘타인을 적극적으로 붙잡는다. “지금은 당신의 모든 게 마음에 든다”라며. 지금은 그렇지만, 곧 거슬려 할 테고 지루해할 거라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가장 단순하지만 관객들이 영원히 곱씹을 대답을 한다. “그래 알겠어(Okay).” 이윽고 가는 데로 흘러가 보자는 듯 터져 나온 둘의 웃음은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보다 귀하고 소중한 순간의 기억으로 간직되리라.

작은 일에도 흔들리고 상처받는 인간에게 ‘티끌 없는 마음’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티끌까지 감내하며 함께하는 것, 아껴주고 때론 미운 마음이 들지라도 조금 더 성숙하게 서로를 견디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것, 함께 있는 순간의 반짝임이 모여 사랑을 지탱하게 하는 것,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은 없을지라도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여정 아닐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는 동안 토니 포트 와인이 간절해졌다. 아직 코끝 시린 겨울 뉴욕이 배경이라 녹진함을 더하기에도 좋고, 밸런타인데이를 기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다크 초콜릿을 한 조각 곁들여 마셔도 좋겠다. 게다가 달콤함과 쌉싸름함이 공존하는 와인 아닌가. 연애 초기의 달콤함과 오랜 숙성에 따른 원숙미, 약간의 쓴맛이 공존하여 풍성함을 더하는 와인. ‘이터널 선샤인’에 담긴 사랑의 본질에도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와인이라고 꼽고 싶다.

